바우하우스는 현대 건축과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교육 기관이다. 그로피우스는 예술과 수공예는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바이마르에 있었던 예술 및 수공예 학교의 여러 공방들을 통합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건축가와 예술가는 장인을 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윌리암 모리스와는 반대로 그로피우스는 생활 환경을 조성함에 있어 기계의 사용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이끌었던 바우하우스에서는 건축을 매개체로 삼아 예술과 공업, 예술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려 했다. 바우하우스 초기의 교과과정은 두 분야로 구분되었다.
한 분야는 재료의 이해에 중점을 두었고, 다른 분야는 형태를 강조했다. 재료에 대해서는 공예가들이, 형태에 대해서는 예술가들이 가르쳤다. 기능주의 건축이 기술과 형태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을 뿐, 기능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로피우스는 뛰어난 교수들을 규합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유명한 예술가들이 된 것으로 보아 그의 뛰어난 안목을 증명한다. 1919년에는 요하네스 이텐이 바우하우스로 왔으며, 같은 해에 화가인 리오넬 파이닝거와 조각가인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도 합류했다. 1921년에는 폴 클레와 오스카 슐레머가 합세했으며, 1922년에는 바실리 칸딘스키가, 1923년에는 화가 겸 사진작가이며 또한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한 라츨로 모홀리나기가 바우하우스로 초청되었다.
1923년경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들은 바우하우스에 공산주의의 영향이 스며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압력으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에 뎃사우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교과과정이 바뀌게 되는데, 이원적이었던 교과과정은 폐지되고, 이제 한 사람이 재료와 형태를 가르쳤다. 이들 중에는 바우하우스의 우등생 출신인 마르셀 브로이어나 요제프 알베르스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로피우수는 "우리는 가식적인 외관과 기교를 벗어 던지고, 명료한 유기적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다. 기계와 라디오와 빠른 자동차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걸맞은 건축, 곧 그 형태를 통해 기능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1928년에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을 사임했으며, 한네스 마이어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마이어도 1930년에 압력을 받아 그만두었으며, 그로피우스의 추천을 받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이 되었다. 1932년에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으로 이전했다가 1년 후에 나치 정권에 의해 해산되었다.
1953년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미스는 그로피우스에 대해 말했다. "바우하우스는 확실한 프로그램을 가진 교육기관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이념 같은 것이죠. 그로피우슨느 이 이념을 매우 정밀하게 다듬어 냈습니다. 바로 그 이념이 여기까지 펼쳐져 온 겁니다."
발터 그로피우스, 독일 뎃사우의 바우하우스
이 건물은 강의동, 작업 공방, 기숙사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각자 독립적인 날개 건물들에 수용되어 있어서 서로 기능적으로 분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바우하우스의 개방적이고 동적인 형태는 주 날개 건물들을 연결하는 요소들 덕분에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강의동과 작업 공방은 진입로 상부를 가로지르는 건물에 의해 연결되는데, 이 연결 건물에는 행정실과 건축학과를 두었다. 작업 공방과 기숙사는 집회실과 식당이 있는 낮은 건물을 통해 연결된다.
그 결과 나타난 건물은 다음과 같은 그로피우스의 말 그대로이다. "축에 의한 대칭 형태가 보이는 공허한 모습은 자유롭고 비대칭적인 군집이 보이는 활력에 찬 율동적인 평형에 자리를 내주었다."
외벽은 다양한 처리를 통해 그 뒤에 자리한 내부 공간의 유형들을 표현한다. 강의동과 행정실은 연속된 창문 띠로, 작업 공방은 연속된 유리 커튼월로, 기숙사는 돌출 발코니가 붙은 개별적인 개구부로 처리했다. 모든 곳에서 벽은 철근콘크리트 골조를 에워싸는 얇은 피막을 이룬다. 작업 공방의 커다란 유리 커튼월은 투시와 반사가 이루는 환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디온은 이 건물을 1911~12년에 피카소가 그린 입체파 그림과 비교했다. 이 그림은 사람 얼굴이라는 단일한 대상의 두 면을 동시에 보인다. 작업 공방 모서리의 '탈물질화' 처리를 통해 우리는 이 건물의 두 면, 곧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복합 건물을 크기, 재료, 위치가 각각 다른 육면체들을 서로 대조되게 병치시켜 배려하고 있다. 이 건물의 목적은 육면체들을 지면에 정착시키는 것이 아닌, 대지 위에 부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육면체들을 병치 되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미묘하고 깊숙이 상호관입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볼륨들 간의 경계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 1층 평면은 확장되어 대지 밖으로 뻗어나가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 동적인 바람개비 모양의 디자인은 한순간 포착되어 고정되어버린 공간 내에서의 움직임을 암시한다. 이 건물은 입체파와 미래파가 의도했던 바를 건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적 형태
그로피우스가 설명했듯이, 배치에 있어 축에 의한 대칭은 자유롭고 비대칭적인 군집이 보이는 활력에 찬 율동적인 평형으로 대치되었다. 나아가 건물의 전면과 후면의 구별도 없어졌다. 입체파 그림처럼 이 건물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이 필요하다.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진입로는 그가 추구한 내외부 공간의 상호관입을 부각시키고 있다. 기능은 분리되지만 공간의 연속성은 유지되어 있다.
바람개비의 팔들은 대지 너머로 자유로이 뻗어나가며, 수직의 회전축이 이들을 정착시킨다. 몇 개의 주요 건물들과 이들을 잇는 연결부들이 외부 공간을 규정한다. 미스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벽체를 구조 체계와 무관하게 자유롭게 배치함으로써 얻은 효과를 그로피우슨느 여기에서 육면체와 연결부를 이용해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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